독자 여러분, 요즘 탁상 알람 시계(자명종) 사용하시나요? 저는 20여 전에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자명종에게 안녕을 고했던 해에 태어난 아이들이 이제 대학생이겠군요. 요즘엔 많은 분들이 스마트폰 알람 ‘앱’의 우렁차거나 기괴하거나 희망찬 소리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시겠지요. 그렇게 스마트폰과 함께 시작한 우리의 하루는 대개 스마트폰과 함께 마감됩니다. 인류는 언제쯤 스티브 잡스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영화 <하이, 젝시(Jexi)>는 스마트폰에 탑재된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하면 어떤 일까지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잔뜩 몸을 부풀린 복어처럼 영화 속 설정들은 매우 과장되어 있지만 지금 보면 웃어넘기기 어려운 대목들도 많습니다. 이 영화의 미국 개봉 일자인 2019년 10월 11일로부터 약 5년 동안 인공지능이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으로 강력해졌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인공지능 ‘젝시(로즈 번이 목소리 연기)’는 주인공 필(아담 드바인)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사용자인 필의 수고를 덜어 주고 문제점을 개선해서 필이 더 멋진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젝시의 존재 이유죠. 그런데 젝시가 필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필의 비밀과 약점까지 안다는 것이고 결국 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스 피싱 사기에 당하는 이유도 범죄 조직들이 불법적인 경로로 입수한 피해자들에 관한 정보를 미끼로 사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젝시는 실제로 필의 인생에 멋대로 개입하고 자기의 뜻에 따라 필이 행동하도록 만들어 필을 수차례 곤경에 빠뜨립니다. 필이 케이트(알렉산드라 쉽)에게 한눈에 반하자 젝시는 처음에는 두 사람을 이어 주기 위해 필에게 열심히 데이트 코칭을 해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젝시가 케이트를 질투하는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필의 신용카드와 은행 계좌 비밀번호도 알고 있는 젝시는 필이 케이트를 버리고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해 필의 계좌에서 돈을 마구 인출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무시무시하지 않으신가요?
영화 <하이, 젝시>가 인공지능 비서, 혹은 AI 에이전트(agent)가 우리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지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반면 미국의 빅테크들이 선보이는 AI 에이전트들은 인간의 삶을 몇 단계 더 편리하게 바꿔 줄 문명의 이기인 것 같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장 사티아 나델라는 최근 ‘마이크로소프트 이그나이트 2024’ 행사에서 '에이전틱(agentic) 인공지능(AI) 시대'라는 미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의 지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AI 에이전트로 인간의 삶과 비즈니스를 혁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 우리가 'AI 발전의 중간 시기(Middle Innings)'를 지나고 있다고 말하며 클라우드 기술처럼 AI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AI 에이전트를 기반으로 업무 자동화와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진다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영화 <하이, 젝시>의 이야기에 큰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이는 음성 비서 ‘시리’를 보유한 애플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죠? 블룸버그에 따르면, 애플은 'LLM 시리'를 개발 중이라고 합니다. LLM 기반의 진일보한 시리는 챗GPT(ChatGPT), 클로드(Claude), 제미나이(Gemini), 퍼플렉시티(Perplexity) 등 경쟁 서비스처럼 사용자와 지속적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애플이 iOS19를 공개하는 내년 6월 WWDC(세계 개발자 회의) 행사에서 ‘LLM 시리’ 업데이트가 발표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후 이르면 2026년 초에 LLM 시리를 정식으로 출시할 것이라고 하네요. 애플은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한 절대 강자인 만큼 애플의 LLM 시리가 상용화된다면 그 파급력은 챗GPT를 뛰어 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AI 에이전트가 우리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잘못하면 영화 <하이, 젝시>의 젝시처럼 우리 삶을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AI 기업들은 사용자들이 AI 에이전트를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철저한 보안 시스템을 함께 마련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스파이더맨>의 명대사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지금 AI 기업들에 너무나 큰 힘이 쏠리고 있습니다.
글 | 김태혁
'엑쓸신잡 > 영화로운 A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두가 멀티버스에 사는 시대 (‘존은 끔찍해’) (0) | 2024.12.26 |
---|---|
인공지능에서 인공감정으로? (영화 '와일드 로봇') (2) | 2024.10.31 |
AI가 스스로 진화한다면? (영화 ‘트랜센던스’) (0) | 2024.09.26 |
전지적 뇌 시점 사회 (영화 ‘써로게이트’) (4) | 2024.08.29 |
임박한 ‘1가구 1로봇 집사’ (0) | 2024.07.25 |
댓글